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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기괴한 설정의 예술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베네치아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건 알았지만, 제가 이 정도로 깊이 이입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가여운 것들》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여성이 세상을 처음 마주하는 이야기인데, 보는 내내 제 과거의 어느 시절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벨라. 출처: Searchlight Pictures, 영화 《Poor Things》 공식 스틸



이입: 다시 시작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

영화의 중심인물 벨라 백스터는 천재 외과의사 고드윈 백스터에 의해 재생된 존재입니다. 성인의 신체를 가졌지만 언어와 인식은 갓난아이에 가까운 상태에서 출발하는데, 이 설정이 처음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저는 생각을 바꾸게 됐습니다.

이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개념이 바로 타뷸라 라사(Tabula Rasa)입니다. 타뷸라 라사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서판'이라는 뜻으로, 인간이 태어날 때 아무런 선입견 없이 순수한 상태로 시작한다는 철학적 개념입니다. 벨라는 사회가 여성에게 심어주는 수치심, 순종, 침묵 같은 규범을 처음부터 학습하지 않은 채로 세상을 마주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행동은 때로 당황스럽고, 때로는 너무나 자유롭습니다.

제 경험상 이 감각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습니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완전히 무너진 뒤 다시 시작해야 했던 사람이라면, 벨라처럼 익숙하던 틀 바깥에서 세상을 새로 배우는 감각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 것입니다. 물론 저는 벨라처럼 극단적인 방식으로 재탄생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선을 긋고 다시 걷기 시작했던 순간, 그 감각이 겹쳐 보였습니다.

영화는 벨라의 성장 과정을 시각적으로도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초반의 고드윈 저택은 흑백 화면으로 그려지고 공간도 폐쇄적입니다. 벨라가 바깥으로 나가면서부터 과장된 채도와 초현실적 배경이 등장합니다. 이 미장센(Mise-en-scène) — 화면 안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배치하는 연출 방식 — 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벨라의 내면 상태를 직접 반영하는 장치로 읽혔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꽤 정직한 방식으로 성장을 그리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벨라에게 자유를 제안했지만, 점차 그녀의 선택을 통제하려 하는 덩컨. 출처: Searchlight Pictures, 영화 《Poor Things》 공식 스틸

 

요약: 벨라의 재탄생 서사는 타뷸라 라사 개념과 미장센을 통해 표현되며, 삶을 다시 시작한 경험이 있는 관객에게 예상보다 깊은 이입을 유도합니다.

 

통제: 자유를 준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속내

벨라를 바깥세상으로 이끄는 인물은 변호사 덩컨 웨더번입니다. 처음 그는 기존의 도덕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벨라가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자, 덩컨은 점점 벨라를 통제하려 합니다. 여행을 함께 떠났지만, 그는 벨라가 자신이 상상한 방식으로만 자유롭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솔직히 이 장면들이 저에게는 가장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돕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람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물기를 바라는 경우, 생각보다 흔합니다. 저도 그런 관계를 경험한 적이 있었고, 당시에는 그게 통제인지 애정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가스라이팅(Gaslighting)입니다.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의 현실 인식을 왜곡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작을 의미합니다. 덩컨의 방식은 노골적인 폭력보다 훨씬 교묘합니다. 그는 벨라를 아낀다는 언어로 벨라의 선택을 흔들려 하고, 자신이 제공한 자유의 틀 안에서만 벨라가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이런 구조는 영화 속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현실에서도 충분히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이 영화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포함해 4개 부문을 수상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출처: 미국 아카데미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엠마 스톤이 연기한 벨라는 통제당하는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닙니다. 덩컨의 조작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벨라가 처음부터 수치심과 순종의 언어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 자체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벨라의 여정에서 통제의 형태는 한 가지가 아닙니다. 고드윈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덩컨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남편 알피 블레싱은 소유라는 이름으로 벨라를 붙잡으려 합니다. 이 세 가지 방식은 표면이 다를 뿐 구조는 같습니다.

  • 고드윈: "보호"의 언어로 저택 밖을 차단
  • 덩컨: "자유"의 언어로 자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길 요구
  • 알피 블레싱: "소유"의 언어로 과거의 역할로 되돌리려 시도
요약: 벨라를 둘러싼 세 남성의 통제 방식은 언어만 다를 뿐 구조가 동일하며, 가스라이팅 개념을 통해 이 영화의 심리적 핵심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자유: 넘어진 뒤에 스스로 고른 방향

벨라가 파리에서 성 노동을 경험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 중 하나입니다. 제가 처음 이 대목을 볼 때는 솔직히 불편했습니다. 성인의 몸을 가졌지만 경험이 없는 상태의 벨라가 성적인 장면에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서, 관객에 따라 윤리적인 의문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파리 장면까지 이어지면서 저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 장면들은 벨라의 쾌락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돈, 노동, 계급, 착취라는 구조 안에 성적 경험이 어떻게 놓이는지를 함께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벨라는 이 과정에서 세상이 단순히 즐겁고 신기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웁니다. 성적 경험을 해방으로만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이 영화를 단순한 선정성과 구분 짓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영화 비평 분야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이 에이전시(Agency)입니다. 에이전시란 외부의 강요나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엠마 스톤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벨라를 에이전시를 온전히 갖춘 인물로 설계했다고 밝혔으며, 이 점이 제80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심사위원회가 황금사자상을 수여한 이유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출처: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공식 사이트).

결말에서 벨라는 완성된 인물이 되지 않습니다. 과거의 남편에게 다시 소유되기를 거부하고, 의학을 공부하며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을 선택합니다. 제가 이 결말에서 통쾌함보다 안도감을 먼저 느꼈던 건, 그것이 화려한 복수가 아니라 조용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아무 제약 없이 행동하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 번 넘어지고 혼란을 겪은 뒤에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그것 역시 자유의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여성의 자유를 성적 경험과 지나치게 긴밀하게 연결했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여성의 해방과 성적 자유를 거의 동일시하는 방식이 또 다른 한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벨라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이 누군가의 품이 아니라 자신의 공부와 진로라는 사실은, 그 비판을 일정 부분 상쇄합니다. 제 경험상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는 과정이 항상 아름답고 일관되지는 않습니다. 벨라의 여정이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요약: 벨라의 자유는 에이전시 개념으로 설명되며, 결말의 조용한 자기 선택이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닌 진짜 성장의 증거로 읽힙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가여운 것들 수위가 너무 높아서 보기 불편하지 않나요?

A. 성적인 장면이 많고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건 사실입니다. 다만 영화가 이를 낭만적이거나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고 과감하게 보여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자극하려는 선정성과는 결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볼 만한 이유가 있는 영화인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Q. 가여운 것들이 여성주의 영화라고 볼 수 있나요?

A. 여성의 자유와 에이전시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 독해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여성의 해방을 성적 자유와 지나치게 연결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나의 정답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은 작품입니다.

 

Q. 가여운 것들 황금사자상 수상 이유가 뭔가요?

A. 제80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습니다. 독창적인 미장센과 시각적 표현, 그리고 여성 서사를 기존의 문법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점이 높이 평가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여우주연상을 포함해 4개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재확인했습니다.

 

Q. 덩컨 웨더번 캐릭터가 단순한 악역인가요?

A. 단순한 악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덩컨은 처음에 진심으로 벨라에게 끌리고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벨라가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자 통제하려 합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인물이라기보다, 자신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타인의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평범한 한계를 가진 인물로 읽히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결론

《가여운 것들》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개인적인 영화였습니다. 기괴한 설정과 화려한 미술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단순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한다는 말과 내가 실제로 원하는 삶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거리를 인식하는 데 필요한 경험의 무게입니다.

벨라에게 이입했던 이유를 돌이켜보면, 그녀의 여정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번 무너진 뒤 다시 자신을 세워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만나는 통제와 혼란, 그리고 마지막에 스스로 선택하는 방향. 이 영화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면, 아마 그 이유일 것입니다. 아직 못 보신 분이라면 불편함을 각오하고 보되, 끝까지 보시길 권합니다. 결말이 달라 보일 것입니다.

참고: https://www.searchlightpictures.com/poor-things/

https://www.labiennale.org/en/news/official-awards-80th-venice-film-festival

https://www.vogue.com/article/emma-stone-yorgos-lanthimos-poor-things-interview